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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Essay

스타벅스를 마치며

kimxesxie_ 2024. 3. 26. 12:14
마지막 날 앞치마야... 못난 주인 만나 고생 많았다
 
신입 시절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퇴사 후 사이렌로고를 바라보면서 내가 스타벅스에 다니던 시절을 회상하는 그런 상상.
 
나도 그런 때가 올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퇴사 당시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드디어 끝났다는 해방감, 앞으로 올 일들에 대한 불안감, 돌아오지 않을 날들에 대한 그리움?
 
만감이 교차해서 무작정 신나지는 않았던 기억이 났다.

 

1. 나의 신입 시절

재수 시절 세계사인지 동아시아인지 아무튼 그 시절 필기

 

우울증 이야기에서도 썼지만, 난 재수를 했다. 그래서 재수 끝나고 돈을 벌고 싶은데 뭘로 벌까 고민하고 있을 때 사는 곳에서 제일 가까운 매장에서 바리스타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서류 넣고 면접까지 다녀왔다.

 

나는 재수를 하고 학교에 가기 전까지 혹은 입학하고 1학년 때까지만 다닐 생각으로 입사했는데 일이 너무 재밌는 것

 

그런데 그 김에 대학도 다 광탈당해서 운명이구나 싶어서 계획했던 시간에 1년을 더 더해서 일했다.

신입 시절 내가 올린 스토리

일한지 3일만에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재밌었어요.

 

독서실에서 갇혀 지내다가 돌아다니니까 알 수 없는 해방감도 느껴지고 좋았지요.

 

물론 대인기피증이 완전히 나은 상태는 아니라 손님들 많아지면 좀 심하게 긴장하긴 했었지만, 그거 빼면 굉장히 행복했던 시절.

 

저때 부재료 레시피랑 내품 외운다고 마인드맵 만드는 거 보면서 이번 신입 무서운 아이구나 생각했다던 선임 파트너 분도 있었다는 이야기. 종국엔 안 무서운 사람이란 걸 뼈저리게 느끼셨겠지만.

결국 모든 메뉴를 먹어보진 못했지만, 맛을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메뉴 도장깨기도 해봤다.(복리 음료 많이 활용하세요.)

 

커피 패스포트에 커피 테이스팅에 대한 글을 써놓아야 입과가 가능했다. 원래 한국에서만 파는 원두만 마시고 쓰면 되는데 난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고 싶어서 해외구매를 감수하고서라도 원두를 사서 마셨다. 코어 원두는 사이렌 블렌드 빼고 다 마셔봤고, 리저브는 계절 프로모션 나올 때마다 다녔었다.

 

커피 매스터 취득을 고려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경제적인 범위가 허용하는 내에서 최대한 다양한 원두로 브루잉해 마셔보길 추천한다.

 

난 도구도 여러 개 써보겠다고 프레스랑 케멕스 구매해서 직접 내려보며 마시기도 했다.

 

우리 매장
타 매장
거의 나혼자 주 7일 근무제. 이때 휴무가 있어도 휴무처럼 안 지냈다. 내 매장 다른 매장 가리지 않고 무조건 밖으로 나가서 파트너 분들의 서비스같은 것들을 배우려고 일부러 스타벅스만 찾아 다녔다. 
내가 젤 좋아했던 선임 파트너분이 만들어주신 그 시절 파트너 음료!
 

이렇게 진심이었다보니 일하면서 오히려 에너지를 얻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퇴근해서도 기분좋게 출근 날 기다리고, 휴무면 괜히 아쉬웠다. 

 

2. 글로벌 커피 매스터

나의 스타벅스 이야기를 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처음에는 초록 앞치마만 입어도 행복했는데, 사람은 끊임없는 욕심을 추구하는 동물인지라 어느 순간부터 검은 앞치마가 입고 싶어졌다. 

 
열심히 살았다

저때 휴무에는 눈 뜨고 감을 때까지 글커매 정리했었다. 인증 하루 전에 친구를 만나 같이 논 적도 있었지만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근무 날. 바마감을 맡았다.

하지만 글로벌 커피 매스터를 취득한 이후 난 스타벅스 내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경제적인 부분, 오래 다닐 곳은 아니라던가같은 상투적인 문제는 둘 째 순서였다.

 

번아웃이 오기 시작했다. 재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생활을 했고, 계속 열정에 불타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수도 있다. 휴무날에도 스타벅스를 찾던 나는 근무하는 시간이 지옥처럼 느껴져서 휴가를 낼 수 있는 순간이 오면 웬만하면 휴가를 낼 정도로 일을 피해다니게 되었다. 그런 마음으로 하다보니 실수는 더욱 잦아졌고, 연차가 쌓이면서 요구되는 역량조차도 내지 못할 정도로 지쳐버린 상태가 되었다. 난 내가 ADHD인가 생각해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번아웃 증상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을 고민한 끝에 퇴사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면 난 다음에 무엇을 해야하지? 고민했었다. 일단 서비스직은 이미 겪어봤으니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졌고, 내가 개발자에 맞는 성격이라기에 아예 개발 쪽을 배울까해서 국비 훈련을 알아보다 지금 내가 수강하는 과정을 알게 되었다. 수당도 지급된다고 하기에 더 고민할 것이 없어졌다. 

8일 전 스벅의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

이걸 지우면서도 실감은 안 났다. 사실 당일까지도 실감은 안 났다.

 

다음 날 로그인을 해도 접속되지 않는 사내 어플 화면을 봤을 때, 그제서야 아 나 진짜 끝났구나, 싶었다.

 

끝나고 바로 다음 주에 부트캠프에 들어갔는데 모든 게 어색했다.

나를 레슬리가 아닌 본명으로 불러주고, 출퇴근 센싱을 찍다 입실퇴실을 찍으니 잘못 왔나 싶고,

셔츠와 검정 운동화를 입고 신지 않는 내가 너무 신기했다.

특히 스케줄 근무라 들쭉날쭉 출근하던 내가 9 to 6 스케줄을 지키는 모습이 한 달 동안은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돌아가지 않을 요량으로 그만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그래도 좋은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레슬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글을 마친다.